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에트 마리 (문단 편집) === 잉글랜드의 왕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Charles_and_Henrietta_by_van_Dyck.jpg|width=100%]]}}} || || 찰스 1세와 앙리에트 마리 || 1625년 6월, 잉글랜드의 세인트 어거스틴 교회에서 15살의 앙리에트 마리는 9살 연상인 찰스 1세와 결혼식을 올렸다.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고 본명인 앙리에트 마리에서 헨리에타 마리아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인들은 주로 메리 왕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결혼 후 가톨릭식으로 대관식을 하길 바랬지만 찰스 1세는 전통대로 신교식으로 대관식을 열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종교적인 이유로 대관식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대관식을 참관했다. 이는 잉글랜드의 대중들에게 안 좋은 첫인상을 남겼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으며, 영어를 못했다. 그리고 프랑스 국왕의 막내동생으로 태어나 사랑만 받으며 살다가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시집을 왔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적절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몰랐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잉글랜드 국민들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가톨릭교도 왕비가 국왕에게 친가톨릭 성향을 불어넣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헨리에타 마리아를 경계했다. 왕의 측근들은 왕과 왕비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잉글랜드로 시집을 오면서 고국인 프랑스인 수행원들을 여러명 데려왔는데, 이는 왕녀가 외국에 시집갈 때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부추김으로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찰스 1세는 헨리에타 마리아의 수행원들을 자기 나라로 돌려보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그로 인해 심한 충격을 받았고 , 그녀와 남편의 사이는 더욱 냉랭해졌다. 그중에서도 부부의 사이를 냉담하게 만든 일등공신은 바로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였다. 찰스 1세가 가장 총애하는 신하였던 조지 빌리어스는 왕비도 자기 맘대로 휘두르려고 했고, 찰스 1세를 구워삶아 헨리에타 마리아를 점점 고립시켰다. 1628년에 조지 빌리어스가 암살당한 뒤 부부의 관계는 점차 나아졌다. 가까운 인물의 죽음과 의회와의 갈등으로 우울한 찰스 1세에게 헨리에타 마리아는 큰 위로가 되었다. 찰스 1세는 진지하고 내성적이였으며, 헨리에타 마리아는 쾌활하고 밝았다. 찰스 1세는 아름답고 명랑한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 왕과 왕비는 정략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로는 드물게 깊은 애정과 유대를 공유하였다. 1629년에 첫 아이 찰스 제임스를 낳았지만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 후계자 [[찰스 2세|찰스]]를 비롯해 여러 아이를 낳았다. 남편의 사랑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헨리에타 마리아는 왕비로써 안정된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찰스 1세 가족.jpg|width=100%]]}}} || || 1632년 가족 초상화[* 왼쪽부터 [[찰스 2세]], [[찰스 1세]], 헨리에타 마리아, [[메리 헨리에타]]] || 헨리에타 마리아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녀가 좋아하며 후원한 화가로는 귀도 레니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등이 있다. 오라치오는 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같이 헨리에타 마리아의 집 천장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 뿐만 아니라 음악, 연극, 건축 등 예술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후원했으며 때론 자신이 직접 극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시어머니인 [[덴마크의 앤]]이 하던 활동과 비슷해 앤이 후원하던 예술가들 중 몇 명은 나중에는 헨리에타 마리아를 위해 작품 활동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